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문단 편집) == 사건의 경위 == [[파일:attachment/insanity-3.gif|width=400]] [[파일:attachment/insanity-2.jpg]] 2007년 7월 13일,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외 분당샘물교회 남녀 교인 19명이 열흘간의 단기선교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 [[베이징시|베이징]]과 [[두바이]]를 거쳐 14일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했다. 출국 인원은 (배 목사 포함) 20명이었지만,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이 통역 및 안내 목적으로 합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 총 23명이 움직였다. 이들은 7월 22일에 일정을 끝내고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7월 15~18일 [[마자르이샤리프]] 지역에서 선교를 겸해 의료봉사와 어린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7월 19일]] 오후, 카불에서 ('''정부에서 특히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던''') 남부지역 [[칸다하르]]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170여 km 거리에 있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에 [[납치]]당했다. 참고로 당시 월간 군사잡지 [[플래툰(잡지)|플래툰]]의 기사에서는 이들이 지나갔던 길을 촬영했는데, "해당 지역을 호위 차량들 없이 버스 한 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평가했다. 이 소식은 [[7월 20일]] 로이터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국군]]을 21일 정오까지 전원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라고 협박했다. 그날로 외교통상부는 국외테러사건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계룡대]]의 별장에서 군 관계자들과 [[골프]] 모임 등을 할 예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새벽, 급히 상경하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후 탈레반은 협상 시간을 하루하루 연장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군 철군에 대해 "연말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탈레반은 새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7월 22일 19시까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해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CNN]]을 통해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아프간에서 철군하겠다는 계획을 재확인시킨 뒤 카불 현지에 협상단을 급파했다. [[7월 22일]], 정부 대책반이 카불에 도착해 아프간 정부, 부족 원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직·간접적 접촉과 중재를 요청했다. [[7월 23일]],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 수를 23명에서 가즈니주에 수감된 탈레반 수감자 55명 전원으로 늘렸다. 한국 정부는 피랍자 23명 중 여성 18명을 우선 석방시키자고 제안했다. 탈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7월 25일]] 끝내 희생자가 나왔다. 탈레반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음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26일까지 하루 안에 수감자 8명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른 인질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26일 정부는 피살자가 배형규 목사(42, 남)[* [[1965년]] [[7월 25일]]생]임을 확인했다. [[7월 26일]] 한국 정부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간에 파견했다. [[7월 29일]] 백종천 특사는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만나 인질·수감자 맞교환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프간 정부는 불가 입장을 밝혔다. 탈레반이 협상시한을 수시로 변경하고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 31일]]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 남)[* [[1978년]] [[6월 29일]]생]이 살해당한 것이다. 탈레반은 수감자 석방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없을 경우 나머지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할 것이라 위협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군사작전이 시작되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과의 대면접촉이 이뤄진 후에야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3일]] 아프간 주재 한국 대사와 탈레반 측은 직접협상 장소를 정하기 위해 통화했다. [[8월 1일]]과 3일 사망자들의 시신이 각각 인도되었다.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가 [[부검]]을 실시한 결과, 두 사람은 모두 총으로 [[사살]]당해 참혹하게 죽었다. 배 목사는 머리에 1발 몸통에 6발, 모두 7발이나 되는 총상을 입었고 심씨는 머리에 2발, 몸통에 2발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8월 6일]] 미국 부시 대통령과 아프간 카르자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탈레반에 대한 양보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프간 정부가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을 거부하고 미국도 이를 동조하자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탈레반을 설득할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10일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이 대면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가즈니주 [[적신월]]사(ICRC)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탈레반 대표는 한국인 인질 8명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조건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고, 한국 정부 대표는 탈레반 수감자 석방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탈레반에 인도주의적 차원의 석방을 요청했다. 8월 11~12일 2차 대면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은 선의의 표시로 건강이 악화되던 여성 인질 2명 석방을 발표했고 이들은 13일에 석방됐다. [[8월 16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가즈니에서 3차 대면협상을 재개했다. 탈레반이 8월 중순부터 인질·수감자 맞교환 조건을 철회할 의사를 내비쳤다. [[8월 27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인질 협상은 본격적으로 진척됐다. 마침내 [[8월 28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4차 대면협상을 갖고 인질 19명 '''전원 석방'''에 합의했다. 한국·탈레반 협상팀은 ▲아프간 내 한국군 연내 철수 ▲아프가니스탄 내 [[비정부기구]] 활동 한국인들 8월 내 철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 활동 금지 ▲한국인 철수과정의 안전 보장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 철회 등 5개 조항에 합의했다. [[http://archive.is/Pn5WN|#]] 이후 [[8월 29일]] 인질 12명이 석방되었고, 30일에는 나머지 7명이 모두 석방되었다. 피랍된 지 42일 만이었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 인원 19명은 [[9월 2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https://news.v.daum.net/v/20210905090043860|#]]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육군]]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를 투입하여 구출해 오는 방법과 협상 중에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고, [[미군]] 역시 구출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현지의 미군과 신생 아프간군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첩첩산중의 땅굴 속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말 그대로 대규모 대 게릴라전이 되어 인질은 인질대로 죽고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대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므로 결국 협상을 통해 인질들을 빼오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 날뛰면서 [[김선일(1970)|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는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질의 목을 자르는]]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과는 다르게 당시의 탈레반은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youtube(PXvSP1xIDR4)] 실제로'''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단|대테러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급파'''되어서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51238|#]] [[https://archive.is/Gcos0|아카이브]] 결국 협상 타결로 인질들이 석방되어서 실작전 투입은 되지 않았지만 구출 계획 구상을 위한 억류 지역의 지형 정보 조사, 탈레반 무장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 동향 등의 첩보 수집과 무기 분석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한 공로로 인정받아 그 특전사 대원들 중 일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https://archive.is/abtxX|#]]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하도록 카불로 파견된 군사협조단 또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불 군사협조단장을 맡은 육군 준장 [[전인범]] 장군 등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예 특전사 1~2개 여단을 투입해서 현지에 있는 미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협력을 받으며 가즈니 주의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작전도 합참이 구상했었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까지 이런 방안이 보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878998|#]] [[https://archive.is/Z9rtO|아카이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많은 각종 의혹 및 해명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https://archive.is/pgyUo|2007년 9월 당시 포스팅 및 기사 모음]]을 참고하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